본문 바로가기
도서리뷰

'신약 시대의 사회와 문화' 요약: 헬라의 철학

by 도서리뷰어 2023. 5. 26.
반응형

헬라의 철학

플라톤의 '아카데미 학당'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 학원'은 두 철학자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이 학당들이 유지가 되었다는 것이 고대 철학의 주류가 이 둘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외에도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었던 철학이 존재했는데, '에피쿠로스'와 '스토아'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학파는 헬라 시대(알렉산더 대제의 서거 후인 주전 323년 ~ 로마제국의 시작인 주전 31년)의 중요한 학파로 자리매김하였고, 이 학파들은 사도행전 17:18에도 바울이 만났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이 두 학파의 의의는 당시 헬라도시들의 상황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학파는 모두 주전 4세기(알렉산더 대제의 재위기간 중)에 시작이 되었는데, 로마에 의해 헬라 여러 도시들이 독립성을 잃고, 로마제국으로 편입이 되었다. 이때 헬라사람들은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끼며 힘든 상황을 맞이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 바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였다. 

각 학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 당시 헬라인들이 가진 사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소위 "숙명론"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의 헬라인들은 '티케(Tyche)'라는 운명의 여신을 숭배하였다. 티케 여신은 사람들이 마땅히 복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변덕스러운 우연을 의인화한 것이다. 일상의 삶 속에는 언제나 변화와 변덕이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와 변덕에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심리 때문에 안정과 내적 평화를 주는 철학, 혹은 선생에 대해서는 무조건 수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에피쿠로스 학파

에피쿠로스(주전 341-270)는 자신의 제자들을 자신의 집 정원에 불러모아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이 학파는 아테네의 비주류학파로 여겨졌다. 이들은 매우 방종한 행위를 일삼았기에 '방종한 자'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수많은 여인들이 에피쿠로스를 숭배했고, 학파의 사상을 널리 전하기 위해 에피쿠로스의 형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 학파는 당대에 전혀 대중적이지 못했고, 공공연하게 무신론을 주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표적이 되었다. 또 이들의 철학이 속세를 떠나 은둔하며 조용히 지내는 것을 권장하였기에 보통의 사람들은 그 철학을 이해하지 못했다. 

에피쿠로스 철학체계의 기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고 항상 운동하는 원자들로 구성된 물질"이라는 것이다. 이원자의 운동은 외부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자 그 자체의 무게로 인한 하향 운동인데, 운동에의한 충돌로 원자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것이 '이탈'의 개념인데, 이 이탈의 개념을 가지고 이들은 자유의지를 설명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과 인간과 영혼도 물질이었다.  신과 인간과 영혼이 불멸의 존재인 이유는 물질이 불멸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쾌락"으로 보았으나, 이 쾌락이 자유방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고통과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였다. 그래서 고통과 혼란을 야기시키는 일들을 의도적으로 피함으로 쾌락을 성취하였다. 과음이나 과식을 하지 않았고, 쾌락을 위한 성관계는 허용을 하나 사랑의 관계는 허용하지 않았으며, 정치적인 활동도 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의 "중요한 신조들"에 반영되어 있는 기본적인 가르침 세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복된 것과 불멸은 괴롭힘을 받지 않는 것이며, 또 다른 것을 괴롭히지 않는다. 

2)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3) 우리는 고통을 일으키는 모든 것을 제거하여 쾌락을 성취한다. 

 

이들의 철학은 현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단순하고 소박하며 물질적인 갈망으로부터 자유함을 추구하였다.

 

 

 

스토아 학파

로마인들은 기원전 마지막 2세기 동안에는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정치적인 활동에 관심을 쏟느라 철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스토아 철학을 마음에 들어 했는데, 그 이유는 스토아철학이 추구하는 엄격한 교리가 '정의', '조화'와 같이 로마인들이 동경하는 덕성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는 견유학파의 크라테스를 추종했던 제논이다. 그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로 알려지게 된 것은 아테네의 스토아(열주, 행각)에서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같이 삶에 대해 수동적이고 숙명론적인 경향을 지녔다. 그는 신들과 신들 위에 있는 운명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기에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대항하지 않는 것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일이 있어도 너무 행복해할 필요가 없고, 나쁜 일을 만나도 너무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논지는 로마시대의 통치자들과 노예들에게도 적용이 된다. 통치자는 자기의 능력 때문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운명 때문에 통치자가 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통치자가 노예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러한 스토아 철학을 모든 통치자들이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철학자의 의무가 정부에 충고하고 정부를 개선하는 데 있다고 이해한 점에서 스토아 철학은 로마의 인정을 받았다.  

제논이 쓴 글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의 추종자들과 비평가들이 남긴 글들은 스토아학파에 대한 포괄적인 견해를 제시해 준다. 이들은 인간의 영혼을 비롯한 모든 것은 물질이며, 물질은 영원하다고 주장하였다. 세상의 역사는 순환한다고 믿었으며, 똑같은 패턴은 아니더라로 비슷한 방식으로 과거에 있었던 일이 현재와 미래에 나타날 것이라 하였다.

1세기말 스토아 철학은 새로운 전환점을 맡게 된다. 이들은 외적인 문제와 관심사를 벗어날 것과 인간 영혼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모든 인간은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에 모두가 한 형제, 자매이며,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존경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