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평전"은 사울 바울의 인생과 그가 남긴 저작에 대한 개론서로서 의미가 있다. 개론서이지만 그 깊이가 남다르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적 예수 탐구'와 '바울 신학 분야'의 선두주자로 인정받는 톰 라이트이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바울이 사도로서 활동하기 전 그의 신앙과 회심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책에서는 시작 파트의 '열심'과 '다메섹' 부분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열심
유대인에게 유월절은 첫 번째 출애굽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절기이기도 하지만, 두 번째 출애굽을 소망하는 기대의 절기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최종 완성된 완전한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소망이 있었지만, 모든 유대인들이 그 소망을 고대하며 경건하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의 문화에 영향을 맡았고, 다른 민족처럼 살고자 하는 마음도 가졌다. 하지만 사울은 달랐다. 사울을 율법을 통해 자신의 정결함을 지키는 "열심"이 있는 유대인 중 하나였다. 일부 유대인들이 "열심"이라는 전통을 따르는 이유는 다른 민족과 같이 되려는 유혹으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려는 것이었다.
이 유대인들에게 있어 "열심"은 행동이었다. 사울도 마찬가지였다. 사울은 바리새인으로써 "토라를 알아야 했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기도를 올려드려야 했고, 정결을 지켰다. 그리고 때가 되면 행동할 준비를 해야 했다." 이러한 행동을 이루는 데에는 폭력이 불가피했다. 그것이 모세오경의 가르침이었다. 모세오경을 어릴 때부터 배워왔던 사울에게 아론의 아들 비느하스의 행동은 "열심"을 위한 거룩한 행동이었다.(한 이스라엘 남자가 모압 여인을 자신의 천막으로 데리고 들어갔을 때, 비느하스는 창을 들고 따라 들어가 두 사람을 모두 죽였다.) 그것이 거룩한 행동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의 의로 여겨주셨기 때문이다. 비느하스의 이 행동은 비느하스 집안을 영원한 제사장 집안으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어졌다. 사울이 비느하스의 행동에만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구약 성경에는 이러한 "열심"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고, 이 나라들이 가나안 우상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을 때, 선지자 엘리야가 등장하였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이들 850명을 모두 죽였다.
사울은 구약의 인물들 뿐 아니라, 자신보다 2세기 정도 전에 있었던 선조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바로 '망치 유다'라고 불렸던, 유다 마카베오이다. 그는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대 민족을 순종적인 피지배민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우월한 무력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혔고, 이곳에 이방신을 예배하는 관습을 들였다. 유다 마카베오는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내었다. 그는 이교도 제국에 대항할 혁명 그룹을 조직하였고, 무력으로 시리아 사람들을 격파하고, 유대민족을 독립시켰다. 이러한 "열심"의 과정에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른다.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이들은 부활을 소망하였다. 이들은 "열심"을 다하다가 희생을 하였을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에 "열심"으로 인한 죽음과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유대교'라 할 때 오늘날 서구에서 말하는 '종교'를 떠올리지만, 여기서 '유대교'는 종교가 아니라 '토라의 전통을 지키려는 열심, 내외부의 부패와 부정함으로 자신들을 지키려는 열심, 이방문화에 순응하거나 타협하려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열심을 권면하는 것',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다메섹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다메섹 도상의 정확한 위치나 바울의 회심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추측과 언급이 많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회심이 어떻게 이루어졌느냐"가 아니라, "바울이 무엇을 믿었느냐"이다.
바울이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믿었는지를 알기 전에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있다. 그런데 소망이라는 것은 어떤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미덕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계속해서 상기하며 소망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한 이스라엘의 훈련은 토라를 연구하고, 기도를 올려드리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사건은 구원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애굽으로부터 구원을 맡는 것과 이후 남북이스라엘이 멸망을 하고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이야기의 구조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성격의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은 철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기인한 것이지만, 애굽에서의 종살이는 그들의 죄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들이 소망하는 하나님이 능력이 있는 참 신으로 인정되려면, 바벨론으로부터 구원이 이루어져야 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참된 평화의 상태(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바벨론 포로귀환 이후에도 이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포로가 되어 있었다. 포로로 잡혀있다는 것은 단순히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 육체의 포로 됨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 정치와 실제 삶, 영과 육이 지배를 받을 때, 그 상태가 포로 됨의 상태이다. 바울 시대 유대인들이 그러했다. 이들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받치는 한, 이들은 로마의 포로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용서를 포함한다. 자신들의 죄에 대한 용서이다. 바울 시대 유대인들은 이런 구원을 이뤄주실 하나님을 늘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바울처럼 열심 있게 하나님을 소망했던 것은 아니다. 분명히 바울은 다른 유대인들보다 탁월한 인물이었다. 이 소망을 위해 바울은 끊임없이 토라를 지키고 연구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남겨준 글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유익했다. 유대인들이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는 기본적으로 "성전의 완성"이고, 이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인간이 살아가는 땅의 하나 됨을 의미한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야곱이 꾼 사닥다리 꿈의 내용이다. 그리고 선지자 에스겔도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됨을 신비주의 형식으로 표현하였는데, 그것이 "바퀴를 가지고 있는 네 얼굴을 가진 생물"이었다. 이 기괴한 형태(지금 우리의 시각에서)의 생물은 '천상의 보좌 전차'이다. 이 예언의 말씀에서 에스겔의 시각은 '천상의 보좌 전차'를 너머 보좌로 넘어간다. 그리고 보좌에 계신 형상을 보게 되는데,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표현하지 못하고, 다만 "인간의 형체처럼 보이는 무언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에스겔은 죽은 자처럼 엎드린다. 에스겔은 예언자의 소명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지만, 그 명령조차도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천상의 보좌 전차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성전과 같은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본문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묵상거리였고,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있기 전에 에스겔의 환상과 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바울 역시 에스겔을 묵상하며 이 환상의 의미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고, 이 환상의 성취를 늘 기다렸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메섹 도상의 바울이 빛을 보고 엎드러진 순간, 그가 보고 경험한 것은 에스겔의 환상의 성취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본 것이 나사렛 예수의 얼굴이었다는 점이다. 지금껏 자신이 연구한 토라와 그가 드린 기도의 초점은 온통 하나님과 성전에 있었고, 그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어떻게 행하실지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본 것은 바로 예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깨닫는다. 지금껏 자신이 보존하고 연구했던 토라가 결국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고, 하늘과 땅을 이어 줄 성전이 예수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베푸실 구원, 하나님 나라의 방법은 예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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