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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리뷰

경제e(경제로 보는 우리 시대의 키워드) 요약: 케인즈와 하이에크, 하이퍼인플레이션, 브레튼우즈 체제

by 도서리뷰어 2023.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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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이미지

여기에서는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와 프레드리히 하이에크의 주장을 간단하게 비교해보고자 한다. 하이에크는 케인즈의 저서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저서에 감명을 받았으나, 둘은 경제학적으로 상반된 의견을 제시함으로 대척점에 서게 된다. 또 1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상황과 2차 세계대전 직후의 경제상황을 각각, 하이퍼인플레이션과 브레튼우즈 체제로 살펴보고자 한다. 종전 이후 세계는 경제 안정을 위해 노력을 했지만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경제학의 근간들이 다듬어졌다.  

 

 

케인스와 하이에크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동맹국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오스크리아-헝가리제국은 1919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생제르맨조약'에 협의를 한다. 이 조약은 이민족의 분리, 독립, 징병제도 금지, 군비제한, 배상금 등에 관한 규정을 다룬다.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영토의 70%을 분리로 잃게 되는데, 이때 탄생한 국가들이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등이다. 영토를 잃고 경제력을 상실한 오스트리아 정부는 승전국에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화폐를 찍어냈다. 이에 돈의 가치가 급속도로 떨어지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작용하게 된다. 이 시기 인플레이션과 국가의 시장참여에 적개심을 가진 이가 있었는데, 그가 하이에크이다. 하이에크는 1899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고, 1917년 통신장교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전장에서 지루함을 달래고자 경제학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이 일로 그는 경제학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게 된다. 전쟁 이후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경험하게 된 그는 국가가 경제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극한 반감을 가지게 된다. 이때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존 메이너스 케인스를 처음 만나게 된다. 종전 후 케인스는 영국 재무성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연합국의 대표들은 패전한 독일에게 과도한 배상금을 청구하였는데, 케인스는 과도한 배상금을 청구하게 되면,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이 화폐를 찍어내고 그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러면 민생이 파탄 나는 등의 경제적 위기가 올 것이라 하였으나, 독일에 대한 반감이 깊었던 대표들은 이 의견을 무시하였다. 이에 케인스는 사표를 던지고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책을 쓰게 된다. 이 책은 패전국의 청년들 사이에서 반향을 일으킨다. 하이에크 역시 케인스의 저서를 정독하였고, 빈대학을 거점으로 삼은 오스트리아 학파에 들어가 경제학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학파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자유시장과 경쟁의 우위성을 주장했다. 하이에크는 빈대학 경제학과 객원강사직 자리를 놓고 시연한 공개강의에서 케인스의 '저축의 역설'을 비판하였다. 케인스의 '저축의 역설'의 논지는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면 경기불황이 온다'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경제학은 케임브리지대학의 신고전학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 케인스가 있었다. 이를 경재자로 여겼던 런던경경대학의 경제학가 로빈슨은 하이에크의 논문을 읽고 그를 런던정경대학에 초빙하여 케인스와의 경쟁구도를 만들게 된다. 두 사람의 첫 대결은 '영국의 실업 문제와 관련한 국가의 통화정책'에 대한 논쟁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촉발된 대공황으로 인해 논쟁의 논점을 바꾸게 된다. 그것은 '시장경제를 무너뜨리는 요인, 이에 대한 올바른 대응, 향후 같은 상황을 예방할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먼저 케인스는 불황의 원인으로 '유효소비가 줄어든 것'을 꼽았고, 이에 정부가 제3의 주체로 항상 존재하면서 통화정책, 세금인하, 공공사업 등으로 유효사업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하이에크는 불황의 원인으로 '많은 투자로 인한 과도한 신용확대'를 꼽았고, 이에 저축으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시장이 자생적으로 질서를 회복할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이퍼인플레이션

 

각 나라가 경쟁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해 자국 통화가치를 의도적으로 하락시키는 일이 있다. 제임스 리카즈는 이를 두고 "통화전쟁"이라 정의하였다. 세계사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통화전쟁은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났다. 1918년 1차 세계대전 휴전협정이 이루어지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진행되었다. 패전국 독일은 식민지 몰수, 자국영토 반환, 징벌적 배상금 지급 등을 하게 되는데,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은 독일은 돈을 많이 찍어내는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 돈을 많이 찍어내면 마르크화의 가치가 떨어지고, 그러면 해외에서 독일상품의 가격이 저렴해져서 독일에 대한 타국의 투자가 생길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돈이 많이 풀리자 통화의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지며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이를 위협적으로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위험이 조짐이 보이던 때 부자들은 마르크화를 외화나 금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혹독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인플레이션 상황이 통제되지 않았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되었다. 당시 미국달러 1달러는 4조 2000억 마르크에 이르렀다. 독일정부는 새로운 통화인 렌덴마르크를 발행하였으나 이것 역시 폭등하는 물가를 막지는 못했다. 

독일의 사태에 놀란 연합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이돈의 안정성을 찾기 위해, 종이돈의 가치를 금에 묶어놓는 금본위제를 꺼내 들었다. 금본위제의 장점은 단순하다는 것이다. 이를 택한 나라는 자국의 종이돈 가치를 나타내는 금 양을 표시하면, 그 즉시 다른 나라의 금을 사고팔 수 있었다. 하지만 금본위제의 장점만을 생각하며 이를 재도입하려는 것은 연합의 국의 생각은 시대착오적이었다. 과거 금본위제를 시행하던 시대와 지금은 달랐기 때문이다. 금본위제의 약점은 곧 드러나게 된다. 전쟁 후 많은 국가들이 경제성장을 하면서 화폐는 급격히 늘어났지만, 금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제한된 금의 기반 위에 '준비금'이라는 명목으로 채무를 쌓아가게 된다.   

 

브레튼우즈 체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 44개국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있었던 '베르사유조약'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통화금융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가 열린 장소가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였는데, 여기에서 '브레튼우즈 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이 체제의 핵심은 국제통화와 금융의 안정성, 자유무역의 확대였다. 연합국은 전 세계 금의 70%를 소유한 미국 달러에 모든 통화를 고정시키고, 미국은 다시 이를 금에 고정시킨다. 연합국은 금 대신 달러를 가지고 있다가 필요할 때 미국에서 금으로 바꾸는 형식이었다. 또  통화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달러에 대한 환율을 다른 나라의 동의 없이는 변경할 수 없도록 고정환율제를 도입하였다. 이 체제는 국제사회의 통화안정을 꾀한다는 장점은 있지만, 미국의 지위를 절대적으로 만든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미국의 힘에 문제가 생기는 순간 전 세계의 통화가 불안정해지는 약점이었다. 실제로 이 약점은 1960년대 린든 존슨 대총령 때에 나타나게 된다. 대통령이 빈곤타파를 목표로 한 정책들을 쏟아내면서, 베트남 대규모 병력 파견을 감행한다. 또 2차 세계대전 이후 호황을 가져온 여러 가지 정책들을 포기하게 된다. 급작스러운 경제적 손실에 무역적자도 커지고 인플레이션이 가중되었다. 미국의 경제위기를 감지한 국가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달러를 금으로 태환 하게 되고, 이에 통화는 불안정하게 움직였다. 금 보유량이 떨어지면서 달러의 가치도 하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1년 닉슨 대통령은 달러를 방어하기 위해 태환(달러와 금을 바꾸는 것)을 중지시키고, 미국에 수입되는 모든 제품에 관세를 10%씩 부과하게 된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에 세계 통화시장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에 선진 10개국은 브레튼우즈 체제는 유지하면서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스미스소니언 체제'를 출범하는데,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노력들이 실패를 하자 1973년 자메이카에서 열린 IMF회의에서 브레튼우즈 체제는 폐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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